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2부 (문단 편집) ==== 종교 ==== 본래 조선은 [[숭유억불]]을 하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도 탄압했지만, 주인공은 자신은 특정 종교를 믿을 마음이 없지만 불교든 천주교든 개인이 믿는 건 상관하지 않고 문화재 보호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불교는 승병 등을 활용하고 천주교는 유럽과의 접촉 통로로 쓴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주인공은 종교 탄압은 안하지만 군주인 자신은 그 어떤 유신론계열 종교의 신자도 되지 않기로 하고, 이 방침은 후대 왕들에게로도 이어진다. * '''[[불교]]''' 1부 시점에서는 원 역사에서 [[연산군]]이 없애버린 [[원각사]]가 그대로 남아있다. 주인공은 왕실 원찰이란 이유로 세금도 안 내는 원각사가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없애면 이게 불교 탄압의 시발점이 되어 원 역사에서의 불교 문화재 [[반달리즘]]이 시작될까 봐 남겨둔다. 하지만 인력이 필요할 때 원각사에서 빼내 쓰는 등 규모가 커지지는 않게 유지한다. 불교를 믿진 않지만 불교 문화 자체는 보존되기를 원한 주인공이 불교를 은근히 감싸줬기에 실제 조선에서보다 불교의 교세가 훨씬 강하고 대접도 괜찮다. 가끔씩이지만 승과도 유지되고 있으며 과격한 선비들이 절에 [[방화]]하는 등 불교에 [[반달리즘]]을 하면 전가사변을 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탄 사찰을 나라에서 딱히 복구해 주진 않는다.] 경인왜란 발발 후 '일본에서는 중들의 취급이 좋다던데 일본에 협력하는 거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지만, 승려들이 더더욱 국란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신을 씻어냈다. * '''[[천주교]]''' 주인공이 유성룡에게 시켜 일본에서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직접 초청하면서 원 역사보다 200년이나 일찍 조선에 전파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1784년]] 혹은 [[1779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세례성사|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있으므로 공식 전파가 빨라졌을 뿐 최초의 신자가 생긴 시점은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한양 사대부들에게 선교를 시도했으나 성과는 처참했고[* 세스페데스 신부가 프로이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귀족들은 그리스 철학자 같은 마인드로 사후세계 따위 인정 안 하는 데다, 학문으로 보는 경우가 가장 우호적인 시선, 그나마 [[천주교]]를 믿는 하층민 신자들도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이해하질 못해서 [[예수]]를 [[석가모니]], [[성모 마리아]]를 [[관세음보살]]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등 유사 불교로 착각하고 있다"고 푸념한다.] 천민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교세를 확장하고 있으며, 무자호란을 계기로 병사들 사이에서도 적게나마 교인이 나타나고 있다. 1590년 시점에서 신자의 수는 약 1만 명이고 대부분 내세에 천국에 가길 원하는 천민들이며, 개성에서는 남만 상인들과 자주 교류하던 중인, 사대부들 중에서도 신자가 생겼다. 도감군 내에도 1,000여 명의 신자가 있다. [[교황청]]에서는 동방의 이교도 국왕이 직접 선교사를 초청한 첫 사례이기에 조선 선교에 크게 주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폐사찰 한 곳을 불하받아 최초의 [[성당|남만사]]로 개장했고 이후 개성에도 성당 하나가 생겼다.[* 사실 2번째 성당은 주인공의 허가 없이 은근슬쩍 만든 뒤 허가받은 것이다.] 일단 반달리즘을 싫어하는 주인공 특성상 그나마 선교하는 지역 문화에 적응하려는 [[예수회]]만 들이고 나머지는 받지 않을 생각이며, 교황청도 이 방침에 조금 불만은 있지만 예수회만 보내고 있다. 주인공은 이에 그치지 않고 유럽에 파견된 견서사에게 교황에게 직접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제사]] 지내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교황은 이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지만 공의회를 열어 확실하게 못 박고자 하며 만일 실제로 제사 허용이 이루어질 경우 동아시아 전역에 천주교의 확산이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왜란이 발발한 후 루이스 프로이스, 호세, 다 실바 등 남만인들이 오다에게 협력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이미지가 나빠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전란 소식을 듣자 팔라데스 신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동원하여 이탈리아식 요새를 건설하겠다고 했고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들에게 도감군 자진입대를 권유하는 등의 고군분투로 이미지 악화는 막았다. 2차 견서사에서 클레멘스 8세에게 추가적인 조치가 있기 전까지 신주를 모시는 것은 불가하나 위패를 모시는 것은 가능하며(위패는 유럽의 초상화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조정의 제사에 참가하면 [[고해성사]]를 하는 조건으로 제사 문제를 임시로 해결받는다. 제사 문제가 대충 해결되자 이전부터 천주교에 호감을 보이던 [[김류]]가 세례를 받고 조선 조정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된다. 1595년 기준 조선교구 소속 신부는 조선교구 주교 팔레데스를 포함하여 총 14명이다. 그 중 11명은 예수회 선교사이며 3명은 부안에 정착한 이주민들 중 포함된 평신부들. 그리고 제3차 견서사가 만난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유럽식 성당을 짓기 위한 건축 기술자 100명을 보내주어 유럽식 대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조선을 통해 중국인, 여진인, 몽골인 신자도 차츰 생기고 있다. 예수회 성직자들이 조선에 적응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사대부들과 한시를 지으며 성리학을 배우는 등 조선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며, [[제사]] 문제를 가톨릭이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온건한 방향으로 선교했기에 원역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선에 잘 뿌리내릴 수 있었다. * '''[[미륵신앙]]'''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탄압받는 신앙. 1부에서 미륵교 교주 배목인의 역모 미수 사건 이후로 미륵신앙은 미친놈들이나 믿는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는 인식이 퍼진 듯하다. 주인공 본인도 당시의 트라우마가 남아 아직도 미륵 얘기만 들으면 이를 간다. 게다가 미륵신앙의 특성상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흥하는 법인데 조선 사회가 안정되어 있기도 하니 교세는 매우 미약할 듯. 더구나 구세주를 원하는 메시아 사상은 천주교에도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미륵신앙보다는 거의 공인된 거나 마찬가지인 천주교 쪽을 더 많이 믿을 것이다. * '''[[회회교]]''' 조선 내의 회교도는 천회사가 모카에서 데려온 동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이 전부. 회회교의 존재 자체는 확실히 알고 있는데, 모카 태수가 사고친 뒤로 회회국도 이들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이 노예병 출신 신자들도 밤마다 주점에 드나드는(이슬람교는 일체의 음주를 금한다) 나이롱 신자들이다. 제례에 술이 필수인 유교 특성상 술을 터부시하는 이슬람 교리와 궁합도 좋지 않다.][* 그런데 주인공이 회회교도들을 국내에 들임으로써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회회교의 극락에까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